잠적, 그 뒤를 밟으면

잠적, 그 뒤를 밟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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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를 하게 된 특별한 계기는
난 어릴 적 국문과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반대가 심하셨다. 당시 어머니는 서울사대 출신의 인텔리셨는데 국문과는 배고픈 과라며 음악과를 강요하셨다. 물론 난 음악과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고 2때 인가, 미대출신인 과외 선생님이 참 멋있어 보였다. 결국, 난 어머니 뜻을 거스르고 홍대 조형미술학과를 선택 했다. 그것이 오늘날의 박정원을 있게 한 것이다.

시인으로 알고 있다. 전혀 생소한 두 장르가 작품 활동에 어떻게 아우르게 되는지 궁금하다.
시를 쓴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지금은 시를 쓰지 않고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시를 사랑하고 있고 내 공예작품 하나하나가 절제된 시어의 표현이다. 아니, 고독한 내 내 면을 형상화 하는데 두 장르는 더할 수 없는 콜라보레이션을 이룬다. 난 외로움을 많이 탄다. 사춘기적 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고, 결혼 생활도 순탄하지 못했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특별히 철학 같은 것은 없다. 단 내 존재를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난 늘 동적인 것을 추구 한다. 틀에 갇힌 것은 싫다. 형식에 매이지 않는 것이 나의 철학이라면 철학이다.

앞으로 계획
내 나이 67세이다. 그런데도 난 여전히 안경 없이 작품 활동을 한다.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 작품을 찾아 주는 관객이 있는 한 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고 싶다. 이것이 나의 계획이며 포부다. 아울러 현재 중국에서의 강의가 좀 더 발전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미지는 존재다. 한 작가의 독자적이고 보편적인 상상력과 대상의 교감에 의한 창조된 하나의 이미지는 독립된 하나의 존재물이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는 인간의 마음 영혼, 존재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인간의 아름다움, 고통, 슬픔 등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느끼는 감동의 표출이 시적 이미지이다.

박정원의 조각시는 ‘흙’이라는 질료, 그 이미지로 개인적은 환각의 세계와 대타인(對他人)관계를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박정원은 시인으로서의 삶 이전에 조각가로서의 삶이 있었다. 박정원 조각 시집은 이러한 개인적은 예술가로서의 삶이 통합적으로 나타난 창조적 산물이다. ‘흙’이라는 하나의 대상물을 놓고 그 물질 상상력으로 창조 될 수 있는 형태적 모습과 언어적 모습을 동시에 실험하고 있는 시집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하나의 물질성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그 물질성은 그 상태로 머물러 있지 않고 작가의 다른 욕망을 촉발 시킨다. 이것을 우리는 역동적 상상력이라 부른다. 이 역동적 상상력이 대상을 변경시키며 다른 존재물로 창조하는 것이다. 조각의 경우와 시의 경우, 이 역동적 상상력이 미치는 힘은 크다. 대상이 되는 물질의 질료성은 작가의 욕망으로서의 상상력, 혹은 의지력으로서의 상상력에 의해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가장 큰 폭으로 변화 한다는 의미이다.

바슐라르는 이 역동적 상상력이 인간의 순수한 욕망, 무상의 욕망에 의한 ‘순수한 승화’ ‘자발적 자발성’ ‘인간최초의 정신’ ‘인간 활동 가운데 마땅히 제게 돌아와야 할 자리, 맨 첫 자리’를 차지하게 하는 침을 발휘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힘은 물, 불, 공기, 그리고 땅이라는 4가지 물질 요소에서 촉발 된다고 말한다.

박정원의 경우, 그 역동적 상상력은 땅에서 달을 형성하는 물질 중 ‘흙’에서 촉발 된다. 박정원의 조각 시집은 ‘흙의 시집’, ‘흙시’들을 엮은 시집이다.
박정원의 ‘흙’은 모태이기도 하지만 죽음이기도 하다. 죽음은 재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흙 속에는 우리의 모든 삶이 담겨져 있다. 인간의 생명과 욕망과 죽음, 그리고 사랑과 증오와 슬픔 등 희로애락과 생로병사 등 이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대표작이 이 한편이다.

말을 삼킨 흙
사랑을 감춘 손
마주 앉은
우울한 진동이
육체를
빚는다. 도발적인

가랑이를 넓게
더 넓게
…슬픔의 방사라며

이 시에서 시인은 흙을 ‘말은 삼킨 존재’로 인식한다. 그리고 ‘손’을 감춘 사랑으로 인식 하기도 한다. 말을 삼켰다는 의미는 많은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그것을 인고하는 혹은 극기 하는 존재로 보고 있다는 의미이다. 많은 것을 담고 있으면서 그것을 내색하지 않는 극기된 욕망 같은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욕망은 세속적인 욕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원초적이고 생명적인 성적욕구라 할 수 있다.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게 하는 강한 생명 욕구, 그러한 성적인 표현을 시인은 ‘우울한 진동’이라는 시어로 표현한다.

왜 우울하다는 것일까? 도발적인 육체를 우울한 진동이라고 표현하는가? ‘슬픔의 방사’라는 시어가 그것을 해명해 준다. 육체는 슬프고 우울하다는 의미 일 것이다. ‘떨림’은 오히려 우울한 것인지 모른다. 생명은 눈부시지만은 않다. 생명은 찬란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생명은 슬프기도 하다.

성적 욕망은 우울하고 슬프다.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소멸, 죽음을 선험 하기 때문이다. 성적 욕망은 죽음에 이르는 가장 강렬한 인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박정원은 흙에서 그것을 배우는지도 모른다. 흙을 만져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박정원 시인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손이라는 창조의 방편을 통해 누구보다도 강한 진동으로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손’은 신의 창조물이긴 해도 신에 대응 하는 창조적 도구이기도 하다. 예술가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박정원의 손으로 흙을 빚어 만드는 여체의 조각 작품들, 그 여체들은 아침 햇살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 여체들 속에서 인간의 내성적 성찰이 함께 빚어져 있다. 그것은 언어적 표출의 한 예가 위의 시이다.

박정원 조각 시집의 시는 ‘흙’이라는 질료로 상상력이 촉발 되지만, 그래서 물과 불 그리고 다른 물질 상상력으로 증폭해나가지만, 키워드는 ‘사랑’과 ‘증오’ 그리고 ‘불구’와 ‘관계’다. 극기의 시학으로 인해 숨겨져 있지만, 21세기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그러나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키워드는 ‘외로움의 광기’ 이다. 예술가에게 있어서 외로움의 광기는 창조의 열정과 힘으로 연결 된다.

그것은 인간 내밀한 영혼과 대화를 가능케 하며 ‘입술’의 감성을 첨예화 한다. 이를 박정원 조각 시집은 보여준다. 쉽게 쓰여 진 듯 보이고, 비교적 소품이지만 많은 이들이 ‘떨림’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한 시집이다.

이런 점에서 박정원 조각 시집의 표제 <잠적, 그 뒤를 밟으면>, 여기서의 ‘잠적’ 이라는 의미는 잠행과 같은 숨은 사라짐을 의미하기 보다는 우리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내밀한 영혼을 의미 한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내면 깊숙이 숨어 꿈틀 거리는 그 무엇에 다한 추적이 이 조각 시집의 화두이다.
유한근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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